– 키 숫자에만 집중하면 놓치는 것들
“우리 아이, 지금 잘 크고 있는 걸까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래 친구와 비교했을 때 키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 잘 크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성장이 더뎌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자연스럽게 키 크는 음식이나 성장에 좋다는 영양제, 운동 등을 찾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23년간 아이들을 진료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조금 다릅니다.
아이 성장은 단순히 현재 키의 ‘숫자’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키가 몇 cm인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속도로 자라고 있는지, 성장할 시기를 잘 지나고 있는지, 그리고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인은 없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이 성장을 방해할 수 있는 신호들
아이의 성장이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키 자체만 바라보기보다 아이의 생활과 몸 상태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잘 먹지 못하는 아이
성장에는 충분한 에너지와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식사량이 지나치게 적거나 편식이 심한 아이, 식사 시간이 지나치게 긴 아이, 먹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아이는 성장에 필요한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아이는 원래 잘 안 먹어요”라고 생각하고 오래 지켜보기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식욕부진이 지속된다면 단순히 먹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왜 잘 먹지 못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잠을 충분히, 깊이 자지 못하는 아이
성장과 수면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장호르몬은 깊은 수면 중에 집중적으로 분비되기 때문에 수면의 양뿐 아니라 수면의 질도 중요합니다. 잠드는 데 오래 걸리거나 밤에 자는 깨는 아이, 코골이나 입호흡이 심한 아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는 단순히 “잠이 부족하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수면을 방해하는 원인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체중이 너무 빠르게 증가하는 아이
성장을 이야기할 때 의외로 놓치기 쉬운 부분이 체중입니다. 아이가 체중이 많이 나간다고 해서 무조건 키가 잘 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기에는 키와 체중이 함께 증가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체중이 키의 성장 속도보다 지나치게 빠르게 증가하거나, 체지방이 많이 축적되는 경우에는 성장의 양상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소아비만이 있는 아이는 사춘기가 또래보다 이르게 시작되는 경우가 있어 성장판이 닫히는 시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어린 시기에 키가 또래보다 커 보이더라도 최종적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소아비만이 있는 아이의 성장에서는 단순히 “살을 빼야 키가 큰다”고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성장기 아이에게 지나친 식사 제한을 하면 오히려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와 영양소가 부족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체중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키가 자라는 동안 체중 증가 속도를 함께 조절하면서 건강한 성장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아이의 키와 체중을 함께 살펴보고, 성장 속도와 사춘기의 진행 상태까지 종합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4. 몸과 마음의 긴장이 높은 아이
아이의 성장에는 신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생활환경과 정서적인 상태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학업이나 또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타고난 기질이 긴장과 불안이 높은 경향의 아이라면 수면이나 식욕, 생활리듬이 함께 흔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장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는 키와 체중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생활 전체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자주 아픈 아이
감기나 비염 등으로 자주 아프고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아이도 성장 상태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이가 감기에 몇 번 걸렸다고 해서 성장이 나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잦은 질환으로 식욕이 떨어지거나 수면이 방해되고, 활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이러한 변화들이 성장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키보다 먼저 봐야 하는 것은 ‘성장 속도’입니다
아이의 키를 평가할 때 현재의 키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또래보다 키가 조금 작더라도 매년 일정한 속도로 잘 자라고 있는 아이가 있는 반면, 현재 키는 평균에 가깝지만 최근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아이도 있습니다. 두 아이의 성장 상태는 같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장에서는 현재의 위치와 함께 성장의 흐름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얼마나 자랐는지, 성장 곡선에서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사춘기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골연령은 실제 연령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종합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키가 큰가, 작은가?”
가 아니라
“이 아이는 자신의 성장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키가 안 크는 게 아이 탓이 아닙니다. 몸이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저는 단순히 키를 키우는 치료가 아니라, 아이의 몸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아이의 성장 속도가 적정한지, 뒤처지는 원인이 체력인지 영양인지 심리적 긴장인지, 어느 부분을 먼저 바로잡아야 숨은 키를 찾아줄 수 있는지 – 이 방향을 정확히 잡는 것이 성장을 돕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방향이 맞으면 아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달라집니다.
성장에는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성장은 일정한 속도로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지고,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성장 양상도 크게 변합니다. 특히 사춘기 시작 시기와 진행 속도는 최종 키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성장에 대한 걱정이 있다면 가만히 기다려주기보다 현재 아이가 어느 성장 단계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다면 한 번쯤 아이의 성장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 또래보다 눈에 띄게 작은 경우
– 최근 1-2년 사이 성장 속도가 이전보다 느려진 경우
– 식욕이 지나치게 떨어지거나 식사가 어려운 경우
– 잠을 잘 못 자거나 코골이•입호흡 등으로 수면이 방해되는 경우
– 잔병치레가 잦고 회복이 느린 경우
– 또래보다 사춘기가 빠르게 시작되거나 진행되는 경우
이때 중요한 것은 아이를 또래와 단순히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만의 성장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성장은 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의 키를 키우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칠 수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이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
그리고 아이에게 필요한 성장의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
이런 기본적인 조건들이 갖춰졌을 때 아이는 자신의 성장 잠재력을 보다 잘 발휘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효과가 있었다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내 아이의 성장 흐름을 이해하고,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이의 키를 조금 더 크게 만드는 것만이 성장의 목표는 아닙니다.
아이가 자기 몸의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펼치면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
저는 그것이 우리가 아이의 성장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급해하지 않되,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마다 성장의 속도도, 필요한 것도 다릅니다. 그 다름을 알아채는 순간이 우리 아이 성장에 대한 중요한 답을 찾는 출발점이 되어 줄 것입니다.
